이 글을 언제 퍼블리싱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자기 비하도 아니고 여의도에 있는 전산인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도 아니다. 그저 나의 경험이 후배들의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작성한다.
전 회사 입사를 위한 자소서에 ‘노량진에서 재수를 했을 때 여의도역에서 먼저 내리는 멋진 어른들이 부러웠다’ 라고 쓰여있다. 거짓은 아니다. 정말 부러웠으니까.

여의도에서 전산인으로 산다는 것을 짧게 멋드러지게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어느 날 팀장님은 나를 혼낸다.

‘너는 SI나 SM 개발자가 아니야. 한 줄도 코딩 하지마. 그 코드 한줄 정성스럽게 짠다고 아무도 너 알아주는 사람 없어. 그런 노가다 허접한 건 다 외주 주고 너는 나와 함께 내 일을 고민해줘. 그게 너의 역할이야’

또 다음 날 팀장님은 나를 혼낸다.

‘너가 ★★★, ▲▲▲, ◼◼◼ 보다(우리 파트의 천재 SM 개발자 분들) 개발 잘 할 수 있어? 너가 명색이 IT 직원이고 이 파트를 이끌어 나가야하는데 파트 외주 개발자를 리딩할 기술력이 있기나 해?’

나는 그 사이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두가지 말 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의도 증권사에서 일하지만 금융인은 아니다. IT직원이지만 개발자는 아니다. 이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마음에 병을 얻을 것 같았다. (실제로 신입 1년 차 때 내 방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쏟아지는 문서 작업과 하루에 3개씩 있는 회의, 매일 생기는 운영 이슈를 해결하고 밀려드는 문의에 답변을 하다보면 진이 쏙 빠졌다. 내가 4년 동안 퇴근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아니 변명이다.

나는 왜 여의도 전산직을 택했는가?

나는 도망쳤다. 4년 동안의 전공 공부에 지쳤고 개발자가 되면 평생 공부해야한다고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개발자로서 경쟁력이 있는가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당시에 코딩 테스트를 안보는 회사가 몇 개의 금융회사들 뿐이었다.

코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냥 코테 공부를 안한 것 뿐인데 왜 스스로 못 할거라고 생각한 걸까? 퇴사를 하고 한달동안 공부를 하면서 골드에 왔고 다음달에는 플레를 갈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건데 왜 나는 바보처럼 지레짐작 포기했는 지… 막상 문제 풀이를 해보니 성취감이 장난이 아니다. 맞았을 때의 희열감은 나를 웃음 짓게 만든다. 마치 롤의 티어를 올리는 것과 같은 재미가 느껴진다.

유명한 말이 진부하게 떠오른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나는 4학년 때 취업 스트레스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안한 채 자소서 복붙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별 노력 없이 전 회사에 합격했다. 필기시험도 50문제 중에 10문제 풀어 냈는데 합격을 했다. 면접도 그냥 저냥 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회사들이 다 떨어졌다.

그럼 나는 왜 전 회사에 합격했을까?

처음엔 내가 승리자인 줄 알았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합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하고 여러 인턴들과 신입사원을 4번 받으며 든 생각은…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뽑혔다.
회사에 와서 신입을 받을 때 윗 분들이 하셨던 말들이 있다.

“잘난 애들 뽑으면 금방 나가서 안돼”

이것과 대조되는 스티브잡스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자신은 A급을 뛰어넘는 S급의 사람들하고 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두 회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게 맞을까? 누군가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에 순응하며 수준에 맞는 회사를 다니라는 뼈 시린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비약적으로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자 치고 털털하고 씩씩한 말투, 내가 이런 이런 걸 했고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 어필하는게 아닌 겸손한 태도. 내가 뽑힌 이유는 스트레스 내성이 높아보이는 털털한 성격(겉으로 포장된, 실제로는 개복치다.)과 너무 잘나지도 그렇다고 너무 못나지도 않은 중간의 인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